어릴 적에 나는 지도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나는 남미, 아프리카, 혹은 호주를 몇 시간 동안 보면서 탐험에 대한 기쁨에 젖어 들곤 했다. 당시 지구상에는 빈 공간이 많았는데,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끄는 곳이 있으면(모든 곳이 다 그랬지만) 나는 그 위에 내 손가락을 올려놓고 말하기를, "내가 크면 나는 이곳에 갈 거야."

Now when I was a little chap I had a passion for maps. I would look for hours at South America, or Africa, or Australia, and lose myself in all glories of exploration. At that time there were many blank spaces on the earth, and when I saw one that looked particularly inviting on a map (but they all looked like that) I would put my finger on it and say, "When I grow up I will go there."

- [Heart of Darkness] 조세프 콘래드(1857-1924) -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여행은 한달 동안에, 일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우리들 속에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갖지 못한다.

여러 날 동안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교회와 공원과 전람회를 구경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남는 것이란 라 람블라 싼 호세의 풍성한 꽃향기뿐이다. 기껏 그 정도의 것을 위하여 구태여 여행을 할 가치가 있을까? 물론 있다.

바레스의 글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톨레도를 비극적인 모습으로 상상할 것이고 대성당과 그레코의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감동을 느끼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오히려 발길 가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분수 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편이 더 좋다. 톨레도나 시에나 같은 도시에 가면 나는 철책을 한 창문들이나 분수에 물이 흘러나오는 안뜰, 그리고 요새의 성벽처럼 두껍고 높은 벽들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밤에 창문 하나 없는 그 거창한 벽들을 따라 거니노라면 마치 그 벽들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만 같았다. 저 방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게 마련인 저 방벽, 항상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저 신비 -- 그런 모든 것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란 바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종류의 사랑 말이다(죠르쥬 상드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사랑 따위는 물론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달력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닥다리를 발로 밀어 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그 멀리마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 같은 것은 잊어버린다(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식 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이미 끝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특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자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래도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냐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니다.

토스카나, 혹은 프로방스의 햇빛 찬란하고 위대한 풍경들 속에서는 눈으로 다 포착하기 어려울 만큼 광대한 평원들이 보이진 자세한 구석구석 또한 모두 다 글로 쓴 듯이 확연하다. 로렝의 그림을 상기시키는 이런 풍경에는 무엇보다도 내가 앞서 말한 그런 계시들이 가득하다.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두시에 자기에게 정해진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려진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 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 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 -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왜냐 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라기보다는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염원들, 그의 사상, 그의 마음의 무(無)를 일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자길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과연 어떤 광경들, 가령 나폴리의 해안, 카프리나 시디-부-사이드의 꽃핀 테라스들은 죽음에의 끊임없는 권유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어야 마땅할 것들이 마음속에 무한한 공허를 만들어놓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와 아름다운 해변에는 무덤들이 있다. 그 무덤들이 그곳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잣뜨르이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엄청난 빛을 보고 그만 질려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세빌리아에서는 궁전, 성당, 과달키비르 따위를 무시해 버리고 나면 삶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유쾌해진다. 그러나 그 고장의 의미심장한 <매혹>을 참으로 느끼려면 지랄다의 정상에 올라가려다가 그곳의 수위에게 제지당해 보아야 한다. <저기는 두 사람씩 올라가야 됩니다> 하고 그는 당신에게 말한다. <아니 왜요?>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지요>.

위대한 풍경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만한 규모가 아니다. 그리스의 사원들이 매우 자그마한 것은 그것이 희망을 허락하지 않는 빛과 무한한 정경으로 인하여 정신이 혼미해진 인간들을 위한 대피소로서 지어졌기 때문이다. 햇빛이 가득 내리쪼이는 풍경을 보고 사람들은 어찌하여 상쾌한 풍경이라 말하는가? 태양은 인간의 내면을 텅 비워버리며 생명 있는 존재는 저 자신의 모습과 - 아무런 의미도 없이 - 대면하게 된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구름과 안개와 바람과 비가 하늘을 가리고, 일거리니 걱정거리니 하는 따위를 구실로 인간의 부패를 은폐해 준다......쌩-피에르 섬에서 맛본 행복감에 대한 루소의 다음과 같은 묘사에 나는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의 시기는 내 마음속에 가장 감동적인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시기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계속성 때문에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루소가 비엔느Bienne에서 맛보았다고 여긴, 그리고 <단순하며 항구적인 것>이라고 그리도 잘 묘사한 그 극도의 희열이란 것은 오히려 어떤 마비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루소는 그의 비참과 죽음을 스스로에게 감추려 애쓴다. 내가 보기에는 극도의 희열이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나는 그들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비극적인 것과 구별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희열은 비극성의 절정인 것이다. 어떤 정열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영혼 속에서는 엄청난 침묵이 찾아든다. 가까운 본보기를 들자면 감옥 속에 갇힌 쥴리앙 쏘렐의 침묵이 그렇다. 그것은 또한 엠마위스 순례자들의 침묵이다. 그것은 성신강림제의 위대한 아침의 침묵이다. 그 침묵을 완전히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은 렘브란트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순간에서 일초만 지나도 삶이 다시 계속될 것만 같다. 그러나 지금은 삶이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 무엇인가에 매인 채 정지하고 있다. 무엇에? 나는 모른다. 그 침묵 속에는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다. 그 침묵은 소리나 감동의 부재가 아니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灣)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莊園)을 찾아가서 정오의 시계가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하릴없는 시간들은 파리에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파니라 런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태양과 바다가 영원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즐기고 공통하고 표현하는 일로 만족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물의 중심에 있으면서 이 땅덩어리의 한 끝을 조금 움직여 본들 무엇하겠는가? 천천히 정오의 시계가 치고 쌩텔름 요새의 대포가 울릴 때 어떤 충만감이 - 행복의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전반적인 현전의 감정이 - 마치 존재의 모든 틈은 다 막혔다는 듯이 나와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빛과 기쁨의 물결이 쏟아져와서 이 수반 저 수반으로 떨어지고 마침내는 가없는 바다 속에 가득히 교여서 멈추었다. 그 순간 (단 하나의 순간) 나는 오직 내 발과 땅, 내 눈과 빛의 결합을 통해서 나를 받아들였다. 같은 순간, 지중해의 모든 기슭에서, 팔레르모, 라벨로, 라귀즈, 아말피, 알지에 알렉산드리아, 파트라스, 스탐불, 스미른, 바르셀로나의 모든 테사스 꼭대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숨을 멈추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라고, 감각적 세계가 한갓 외관의 얇은 천에 지나지 않고 밤이면 우리가 찢어발기고 우리의 고통이 헛되어 걷어내려고 애쓰는 변화무쌍한 악몽의 베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그 베일을 다시 만들고 그 외관을 다시 건설하며 범우주적인 삶을 다시 도약시키려 한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같은 충동이 없다면 범우주적 삶은 들판 가운데서 사라져버리는 샘물처럼 어디쯤에선가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한다. 밟아가야 할 경력이니 창조해야 할 작품이니를 말한다. 요컨대 어떤 목적을, 하나의 목적을 가지라고. 그러나 이런 단계는 내 속에 가장 깊이 잠겨 있는 것에 이르지는 못한다. 목적이라면 나도 어떤 순간들에 그것을 달성해 보았다. 그리고 또 (늘 헛된 것이기 마련인 희망이지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목적은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가장 미천한 조건 속에서, 그리고 송두리째 은총의 결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리하여 어느 날 어떤 친구와 더불어 노르망디식과 비잔틴식 궁전들 즐비한 지중해를 굽어보고 있는 라벨로에까지 걸어 올라갔을 때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충만감을 맛보았다. 심브로네 테라스의 포석들 위에 가만히 엎드려서 나는 대리석 위에 춤추는 빛을 내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있었다. 그 투명함과 그 저항의 유희 속으로 가뭇없이 빠져들었던 내 정신이 문득 고스란히 회복되었다. 일체의 지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바로 그 스펙터클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탄생을, 나 자신의 탄생을 목격하는 듯했다. 어떤 다른 존재가 태어나는 것일까? 구태여 다른 존재랄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나는 획득했다고 그날 나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1924년 성탄절이었다). 나는 획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잃고, 또 헛되이 다시 만회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시간에, 내가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획들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단숨에 획득했다. 나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시키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단숨에 획득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자격을 갖추면 우리는 온갖 것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단 한순간에 참으로 우리는.......?

내가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복건제도를 다 같이 비난한다. 우열을 싫어하며 미래를 설계한다.

이제 내가 말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또 살 수 있을까?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 남아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냐? 내게는 이미 <획득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 말의 힘을 당신은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제로에서 무한으로 옮겨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다음에는 무(無)로 다시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가느다란 실 같은 빛이 남아서 잠속에까지 따라오고 이렇게 귀에 대고 속삭인다. 옛날에 어느 날.......그럴진대 나 자신보다도 더 내면적인 그 존재의 깊숙한 곳으로 천분의 일초 동안에 내가 또다시 달려들어가지 말라는 법이야 있겠는가?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海草)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날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행운의 섬들Les Iles Fortunees]

<섬 Les Iles>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지음/김화영 옮김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