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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친필>

   


'학소도' 는 학의 둥지가 있는 섬이란 뜻으로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집에 붙혀진 이름이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공동으로 작명한 것인데, 끝에 '섬 도'자는 도시 속의 섬을 의미한다.

'학소도'는 나의 부모님이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이며 나의 누나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에서 12살 때까지 살았고, 1979년 이곳을 떠난 이후 15년간의 외국생활과

5년간의 국내생활 끝에 1999년 12월, 적확히 20년만에 홀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재 나는 '학소도'에서 애견 3마리(구구, 서울이, 학순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다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독일일어의 <하임베Heimweh> 또는 네덜란드어의 <하임베heimwee>는 모두 고향에 대한 향수로 생긴 병을 뜻한다. (p. 10)

향수를 다룬 최초의 서사시인 [오디세이아]가 태어난 것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여명기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해 두자.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모험가인 율리시스는 가장 위대한 향수병자이기도 했다......율리시스는 칼립소에게서 진정한 <돌체 비타> 즉 안락한 삶,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얻었다. 그러나 타지에서의 안락한 삶과 집으로의 귀환 사이에서 그는 귀환을 택했다. 미지의 것에 대한 열정적인 탐험(모험) 대신에 그는 익숙한 것에의 예찬(귀환)을 택했다. 무한(왜냐하면 흔히 모험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고 여겨지므로) 대신에 종말(왜냐하면 귀환은 삶의 유한성과의 타협이므로)을 택했다. (p. 12-13)

 -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향수Ignorance> 중에서

 

 

최근(아마도 2000년?) 나를 인터뷰했던 어느 기자의 눈에 비친 '학소도'이다.

 鶴학巢소島도

   

 

 

     

     

  

사람의 감성이 곧 집의 감성이 아닐까. 사람의 삶이 면면이 배어들고 사람의 마음이 표현되고 사람의 정서가 녹아드는 집. 그러한 감성 풍부한 집을 그리고 싶다. (책을 내며)

그 집에 사는 사람에게 특별한 무엇이 있는 집, 특별한 기억을 자아내는 집, 그런 집이야말로 가장 좋은 집 아니겠는가? (19)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한 편의 소설이 되듯, 자신의 집이란 그 소설의 배경이 된다. (26)
 

집은 삶의 흔적이다......집의 문화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다. (29)

어딘가 비밀스러운, 은밀한, 그 무엇이 더 있을 듯한, 새로운 무엇이 더 펼쳐질 듯한, 무언가 변화가 있을 듯한, 무언가 변화를 줄 수 있을 듯한 그 무엇이 있을 때 집에 대한 애착심도 더 커진다. (55)

현대의 집에서는 불이 아니라 대개 '열'이 있을 뿐이다. 기름, 가스, 전기를 쓰면서 열은 어디선지 만들어져 피부로 느껴지지만 불 자체를 느끼는 경험은 없어졌다. (114)

우리 사회는 진정한 변혁기에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외형적 현대화라는 명제에 사로잡혔다면, 지금의 사회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내면적 성장이라는 명제에 접하고 있다. 외형발전 속에서 소득이 늘고, 살림이 편해지고, 핵가족화가 되고, 교육열풍이 불고, 집이 부동산화되고, 환경이 오염되고, 가치규범이 흔들려 왔다면 이제 내면적인 성장 속에서 삶의 질의 문제, 기술의 생활화 문제, 평생 배우기의 가치, 환경자원 아끼기의 가치, 인간중심의 사고, 건전한 가치규범 세우기 등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127)

선택은 자유이되 선택의 결과에 대한 인식은 필요하다. (128)

빗소리, 눈소리, 만질 수 있는 흙, 친구 같은 식물과 동물, 흐르는 기, 변화하는 빛과 열, 인간과 집의 소화기능 등. 지구가 태양을 따라 돌고 달이 지구를 따라 돌면서 펼치는 영원한 역학 속에서 인간 역시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가는 순환을 반복한다.

무릇 집이란 자연과의 관계맺기다. '자연으로부터의 보호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그 하나이고, '자연의 선물을 어떻게 즐기느냐'가 다른 하나다. 자연은 한편 위협적이기 짝이 없고, 다른 한편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준다. 자연에 비하면 인간이란 일개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168)

시간이 배어 있는 집.....새 집 같지 않고 시간의 격이 느껴지는 집, 많은 시간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집,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집, 시간의 층이 느껴지는 집, 시간의 켜가 느껴지는 집.....그야말로 '멋이 담겨 있는 집' 아닐까.

'시간이 배어 있는 집'은 어떤 집일까?

첫째, 거기 있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집

둘째, 쌓여진 시간이 느껴지는 집.....많은 시간의 층들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집, 말하자면 그 집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집

셋째, 시간에 따라 무쌍하게 변화하는 집.....말하자면 시간에 따라 여러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는 집 (182)

시간마다 새로운 집......시간이 배어 있는 집의 또 다른 의미란, 시간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집일 것이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은 집, 말하자면 항상 똑같아 보이는 집은 별로 재미없다.

시간마다 새로운 집이란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의 시간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집, 일주일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집,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집일 것이다. 시간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빛이다.....

계절의 변화는 빛의 변화에서도 나타나지만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의 변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파릇파릇한 봄,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 단풍 지는 가을, 나뭇가지 모양새가 그대로 나타나는 겨울은 따뜻한 빛의 봄, 뜨거운 빛의 여름, 기다란 빛의 가을, 어스름한 빛의 겨울과 더불어 시간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190)

시간의 기록이란 기억의 기록이다. 기억의 폭이란 저으이 폭이다. 시가느이 깊이란 멋의 깊이다. 집은 시가느이 갤러리다......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온 시간을 증거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다면,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사는 모습을 표현하는 집이라면, 그것이 바로 '시간 있는 집'일 것이다. (195)

학소도의 겨울 풍경 (2001년 1월)

모든 집이 그 집만의 색깔이 느껴지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261)

나는 아름다운 집, 좋은 집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나 고정관념도 깨뜨렸으면 좋겠다. 그러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우리 각자의 삶을 우리 각자의 것이 아니게 만드는지,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우리의 삶을 좁게 만드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삶을 자기 집에 담으려는 감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315-6)

집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람을 통해 집을 만나고 싶다. (317)

 - 김진애씨의 <이 집은 누구인가>(한길사) 중에서

 

학소도의 뒷산인 인왕산 등산길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사직동(社稷洞)·누상동(樓上洞)·옥인동(玉仁洞)과 서대문구(西大門區) 현저동(峴底洞)·홍제동(弘濟洞) 사이에 있는 산. 해발고도 338m. 산 전체가 화강암인 바위산으로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산능선을 따라 서울의 성곽이 지나고 있으며 동쪽 산허리에는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나 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 명산으로 숭앙되어 북악을 주산으로, 남산은 안산(案山), 낙산(駱山)과 인왕산을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삼아 궁궐을 축조하였다. 한때 입산이 금지되었으나 25년만인 93년도에 개방되어 많은 등산객이 찾는산이다. 굳이 다른말이 필요없은 멋있는 바위산이다. 주변엔 약수터도 많고 기차바위, 치마바위, 매바위, 이슬바위, 모자바위, 선바위등 기이한 모습의 바위들이 즐비하다.

 

인왕산은 1968년 1월에 김신조 등의 무장간첩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길로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1993년 4월까지 25년 동안 청와대 경비를 위해 입산을 전면 통제했기에, 서울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오염이 적고 맑고 깨끗한 약수터도 11곳이나 보존되고 있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신라와 고려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열었던 호국법회 "인왕도량"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왕경>의 내용에 따르면, 어진 임금이 되기 위해 열었던 법회라 하는데, 인왕경은 부처님이 여러 나라 왕들을 위해 설법한 것으로, 통치술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 불경이라고 한다.

사직공원 뒤에서 황학정을 지나 성곽터로 가지 말고 곧바로 약수터를 지나면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황학정은 조선시대 무인들이 활쏘기 연습을 한 오사정의 하나로 경희궁 북쪽에 지었던 정자를 필운동의 등과정터에 이전하여 세운 것으로 구한말까지 남은 유일한 궁술 연마장이다. 지금도 궁술행사가 계승되고 있다. 돌과 철로 된 계단을 900개쯤 오르면 매바위와 정상을 휘감는 듯한 치마바위가 보인다. 치마바위는 단경왕후 신씨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단경왕휴는 중종인 진성대군의 원비이면서 신수근의 딸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못 이긴 중신들이 중종반정을 꾀하려 영의정 신수근을 주살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옹립했다.

억지로 왕이 된 중종은 아내 신씨를 염려하여 재빨리 왕후로 봉했다. 하지만 신수근을 주살하고 반정을 일으켰던 중신들은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내세워 중종에게 몰아낼 것을 강요했다. 아내를 사랑했던 중종은 왕위를 물리면 물렸지 그럴 수는 없다고 해서 중종과 반정의 주모자들 사이에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자 이를 보다못한 신씨가 남편을 위해 물러나며 살아 있는 동안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널어 놓겠다고 약속을 남겼다. 중종은 얼마동안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경회루에서 인왕산 바위를 살폈다. 그러나 곧 아름다운 궁녀들 품에서 단경왕후를 잊었다. 하지만 단경왕후는 그 이후, 51년 동안 중종에게 "나 여기 잘 있습니다"하고 세상 떠나기 전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었다고 한다.

화강암 암반으로 되어 있어 도무지 나무가 자랄 것 같지 않은 그 메마른 바위틈으로 푸른 소나무가 가지런하게 돋아 있고, 간간이 잡목이 보이는 것은 서울의 중심에 서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인왕산은 풍수설로도 명당이라 불러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산세가 빼어나서 명산으로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궁궐터로 삼으려 했다는 설도 있다. 일반적으로 명당의 조건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꼽는다.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정할 때에 경복궁을 남향으로 지었으므로 서울 전체의 지형을 놓고 보면 인왕산은 우백호에 해당한다.

산세는 정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렸는데,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능선을 따라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의 하나인 이 성곽은 조선시대 서울의 도성으로 당시 서울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지금의 서울은 서울의 팽창으로 인왕산이 서울의 중심부에 해당하지만, 처음 도읍지로 정할 때만 해도 북악산, 남산 등과 같이 서울을 둘러싸는 외곽에 속했다. 당시에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인왕산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왕산 정상에 오른 (왼쪽에서부터) 학순이, 서울이, 구구

 인왕산[仁王(旺)山]

인왕산은 인왕사라는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중종 때에는 필운산(弼雲山)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산 동록에 필운동이라는 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한양전도 당시 무학대사가 산 중턱에 선암(禪岩)이 있는 것을 보고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백악과 남산을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으로 정치하였고 동향으로 도읍을 정한 일은 없다고 반대하여 백악을 주산으로 정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인왕산에는 인왕사를 비롯해서 복세암 금강암 등 사찰이 있었으나 방자하게 경복궁을 내려다본다 해서 민가 11채와 함께 모두 헐어버린 일도 있었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왕기(王氣)가 돈다는 말에 따라 그 일대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경덕[慶德(熙)] · 인경(仁慶) · 자수(慈壽) 등 궁궐을 짓는 공사까지 일으킨 바 있다. 또 서쪽의 안현(鞍峴)은 인조 초에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나 장만(張晩)의 관군과 반란군의 격전지로 유명하였다.
인왕산 상봉은 대부분 암벽이고 험준하지만 그 동록은 산수 자연이 아름다운 승지로 유명하다. 즉 사직공원에서 북쪽으로 등성이를 넘어가면 필운동의 필운대가 있고 필운대 언덕에서 다시 북쪽으로 내려가면 산록의 골짜기가 깊숙한데 여기에 인왕동 · 옥류동 · 수성동 등의 산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앞으로 송석원(松石園) · 청풍계(淸風溪) 등 명소가 이어져 있었다.
성종 때 사숙재(私淑齋) 최숙정(崔淑精)은 인왕사시에서

「한 구비 임천(林泉)도 좋은데,
천그루의 수목은 맑기도 하네.

끊어진 암벽 이끼끼어 푸르고,
그윽한 시냇가엔 꽃 절로 피었네.

여러 겹 봉우리엔 구름 엉켜 그림자 드리우고,
절반쯤 저 고개 위에 소나무 서서 소리나네.

세상의 뜬 공명이야 꿈엔들 생각하리,
게으른 습성 이래서 이뤄졌네.[]」


「도성내 경복궁 서쪽에 있는데 송회(松檜)가 울창하고 등라(藤蘿)가 가리어 그늘진 곳에 맑은 샘물과 암석이 기이하여 구경할 만하므로 당을 청심으로 이름하였다. 당 앞에는 시내를 따라 아래 위로 수각(水閣)을 지었으니 대개 대부(大夫)가 공사(公事)에서 물러나 성시(城市) 중에서 산림(山林)인 것이다. 전사(前史) 태사(太史) 당공(唐公)이 당의 판액을 청심이라 하고 시를 지었으며 뒤를 이어 글 짓고 판각한 것도 중조명공(中朝名公)의 필이 많다.[]」

하였다. 또 필운동에는 선조초에 원수 권율(權慄)이 이 마을에 살았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소시(少時)에 처가인 만취당 권율의 집에 자주 와서 놀았으며, 현재 석벽에 남아 있는 ‘필운대(弼雲臺)’의 각자는 백사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의 꽃 기운 성중을 누르는데,
화창한 봄빛은 만호장안(萬戶長安) 넘치네.

늦은 햇볕 쪼여들어 안개 엉키고,
가벼운 티끌 고요한 바람에 잠시 멈추네.

귀공자들 말 몰아 북쪽에서 오는데,
높이 솟은 두 대궐 동쪽으로 보이네.

삼십년 전 이 곳에서 봄을 바라보았지만,
다시 만난 지금은 백두옹(白頭翁)이 되었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자연경관이 점차 바뀌어 지고, 필운대의 글자가 새겨진 근처에도 민가가 밀집되기 시작하였다. 이 곳 인가에서도 옛날의 풍경을 살리기 위해 집집마다 ‘필운상화’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 화초를 심어 봄날이 되면 백화가 만발하여 옛날의 정취를 느끼게 하였다. 백사의 후손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은 고종 10년(1873)에 필운대를 증축하고 감회어린 마음으로 시 한 수를 기록하였으니

「우리 선조 옛 터를 후손이 다시 쌓으니,
푸른 솔 석벽 위에 흰 구름 덮이네.

아름다운 유풍(遺風) 수백년 지난 것이,
부노(父老)들의 의관은 오늘도 예와 같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의 유심청한(幽深淸閑)한 풍광은 찾아볼 수 없다. 명성이 높았던 필운대도 학교 건물에 가렸으며, 간혹 수림과 석천의 일부도 일부 인사들의 독점물이 되어 버려 시민들의 휴식처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인왕산 동록(東麓) 깊숙한 계곡에 송석원이 있다. 이 송석원(松石園)은 정조 때 시인 천수경(千壽慶)이 옥류천 근처 소나무 바위(송석) 아래 초라한 집을 짓고 송석도인으로 자처하면서 흰 구름을 바라보고 청산을 대하면서(有時看白雲 鎭日對靑山) 동인들과 함께 시를 읊었는데 이 모임을 송석원시사서사(松石園詩社西社) 또는 서원시사(西園詩社)라 불렀으며 뒷날 서민문단의 모체가 되었다. 이 송석원은 인왕산 여러 골짜기 물이 석벽과 협곡을 내려오다가 송석원이란 글이 새겨져 있는 앞으로 모여 흐르는데 물이 거울처럼 맑고 차서 이름 그대로 옥류천이라 하고 그 아랫마을 이름도 옥류동이라 하였으며, 이 마을에 등용정(登龍亭)이라는 사정(射亭)을 두어 도성 무사와 한량들이 즐겨 찾기도 하였다.


「북쪽의 맑은 냇물 늦게야 펼쳐지는데,
꽃잎은 떨어져 푸른 이끼에 떨어지네.

진세(塵世)의 봄빛 가는 곳 어디인가,
천하의 영웅도 이 곳에서 술잔 드네.[]」

그 뒤 1910년 순종에게 강요하여 합방조약에 옥새를 찍게 하고 일제로부터 자작의 칭호까지 받은 윤덕영(尹德榮)이 이 곳에 그의 호화주택을 1914년부터 짓기 시작하였는데 6,000여 평의 건평에 40여 개의 방이 모두 호화롭게 장식되어 고대 중국 진시황제의 아방궁을 방불케 한다 하여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리었다. 이 집의 설계는 당시 주불공사로 가 있던 민영찬(閔泳讚)이 귀국할 때 가지고 왔던 프랑스 설계사가 작성한 도면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설계가 복잡한 데다가 또 주인의 감독마저 까다로워 도중에 몇 번인가 중국인 청부업자가 바뀌고 나중에 일본인 청부업자에 의뢰하여 만 4년 만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집 주위에는 수십 칸의 하인들의 방을 만들고 수만 평에 달하는 부근 일대의 토지를 점령하여 글자 그대로 ‘옥인동 만리장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평(世評)이 분분해지자 그는 ‘홍만종교본부(紅萬宗敎本部)’라는 간판을 걸고 종교 건물로 가장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 윤덕영이 죽은 뒤로는 일본 재벌 삼정(三井) 회사의 사무실로 사용된 바 있다.[]
인왕산 서록, 즉 현재 종로구 옥인동은 옛날 옥 같은 샘물이 돌 사이에서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석벽 위에 ‘옥류동(玉流洞)’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숙종조의 문인 김창흡(金昌翕)은 옥류동에 있는 누각을 청휘각(淸暉閣)이라 부르고 그 앞 시냇물을 탄뢰란(灘瀨瀾)이라고 명명한 바 있으며[] 또 영조 때의 도성지도에는 옥류동이 인왕산 밑의 수원처(水源剔8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그 이전부터 수석의 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옥류동 계곡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인왕산 동학(洞壑) 중에 천수경이 복거(卜居)한 송석원(松石園)이 있으며, 옥류동 칠성대 근처 석벽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필적으로 전해지는 ‘송석원’의 각자(刻字)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학단(學斷8 김규원(金圭源)은 당시의 경관에 대해

「송죽으로 만든 창문 산을 향해 열렸는데,
선비들 의관 흩날리며 줄이어 찾아드네.

푸른 수림은 청량세계를 이루고,
석양의 붉은 노을 누대에 비치네.

삼생(三生)의 깨끗한 마음 병속의 얼음처럼,
느티나무 뿌리 베개삼아 몇번이나 꿈꾸었나.

좋은 글 얻으려는 고질병에,
날마다 줄어드는 허리 매화나무처럼 여위어지네.[]」

또 인왕산 동록 계곡은 그윽하고 깊숙하여 항상 백운(白雲)이 덮여 있어 백운동이라 불리었다. 조선 초기 중추부의 이염의(李念義)라는 사람이 이 동곡(洞谷)에 들어가 살자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최근 청풍동과 백운동의 두 마을을 합쳐 청운동으로 바뀌었다. 이 백운동은 도성의 서북쪽 모퉁이에 해당하는 곳으로 산도 높지 않고 골짜기도 그렇게 깊지 않지만 푸른 송림과 등나무 넝쿨이 엉켜 있는 사이로 맑은 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아침 저녁으로 흰 구름이 덮여 조야(朝野)의 많은 명사들이 백운동천(白雲洞天)을 찾아 하루를 즐겼던 것이다.
성종 때의 문신인 점필재(컒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송악 오백년에 왕기 다 하였으니,
자하선인(紫霞仙人)이 의지할 곳 없었네.

화악(華嶽)의 태평시대 만세를 기약하는데,
백운동의 주인공은 꽃다운 자취 따르네.

도성의 서북쪽 금잔지(金盞地)에는,
소나무와 도토리나무가 그늘 지우네.

바위에 걸쳐 정사(精舍) 지으니,
중화당(中華堂) 모습이 저 멀리 보이네.

물 흐르는 소리는 거문고 비파 울리듯,
계곡의 안개는 병풍처럼 장막쳤네.(하략)[]」

하였으며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은

「백운동 저 속에 흰 구름이 그늘졌는데,
백운동 밖에는 홍진(紅塵)으로 깊었네.

외길을 돌고 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도시 안에 산림을 감췄는데 놀랐네.

계곡 물은 인가따라 소리내고,
장송(長松)은 반쯤 가려 바람따라 소리내네.(중략)

봄이 오면 바위 골짜기에 산꽃이 피고,
창공엔 새들의 소리 메아리 치네.

매실이 익을 무렵 이슬비 내리면 인가는 희미하고,
동문에는 이끼의 푸른빛 가득히 덮히네.

가을 하늘 맑게 개이면 언덕의 숲들은 목욕한 듯하고,
달밝은 밤이면 장안 집들의 다듬이 소리.

임목(林木)에 흰눈 쌓이면 찾던 거마(車馬) 끊어지고,
장작불 따스한 기운 주단이불 속에 생기네.

동중(洞中)의 풍경은 제대로 사철인데,
냇물에 갓끈 씻고 산으로 오르구나.

기영(耆英)을 맞이하여 높은 회합 가질 때면,
친구들은 동구(洞口)에 들어와 풍악 잡히네.

청아한 노래 투호놀이 즐거움 끝없는데,
몇 발 남은 지는 해는 푸른 산에 낮아지네.

제공(諸公)의 높은 기개 구름보다 더 높은데,
해마다 벼슬아치 서로 와서 찾는구나.(하략)[]」

백운동과 이웃하고 있는 청풍동도 수림과 화초가 만발하여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상영(觴詠)하던 곳으로 청풍계(淸風溪)라 불리었다. 이 청풍계 부근에는 인조 때의 문신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선조 40년(1607)에 이 곳에 들어와 청풍각(淸風閣) 와유암(臥遊菴) 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지기들과 함께 산수를 관상하며 우의를 더욱 두터이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강화도 선원촌(仙源村)에 우거(寓居)하면서 자호를 선원으로 하였다가 이 곳으로 이거한 다음 풍계(楓溪) 또는 계옹(溪翁)으로 자호하고 주자(朱子)의 글씨를 모아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글자를 새겼던 것이다. 풍계의 아우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가면서도 청풍계의 승경(勝景)이 그리워서

「청풍계 위의 태고정은, 우리 형님 사시던 곳.

임학의 절경은 한폭의 수묵화인데,
암벽은 푸른 병풍 이루었지.[]」

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선원은 순절하였는데 그 뒤 70년이 지난 숙종 34년(1708)에 선원의 절의를 추모하여 청풍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이름을 늠연사(凜然祠)라 하였다. 뒷날 이 곳을 찾는 사람마다 선원의 절의를 추모하였다. 그 뒤 이 곳은 안동 김씨의 세전지지(世傳之地)가 되었어도 많은 명사들이 이 곳을 자주 찾아 완상(玩賞)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과 함께 일본의 삼정 회사가 들어서서 이 아름답던 자연과 고적을 훼손하기 시작하였으니 즉 바위를 깨뜨려 시내를 메운 뒤 집을 지었고 단 한 채 남은 태고정마저도 인부들의 숙소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대명일월’ ‘백세청풍’이 새겨져 있던 바위마저 깨뜨려 한쪽만이 겨우 남아 옛날의 모습을 되새기게 할 뿐이다. 1935년경 이윤영(李潤榮)이 태고정터 뒤로 청운양로원을 짓고 부근 자연 풍경을 보호하여 양로원 뒤의 자연은 일부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은 이제 찾아볼 수 없으며 어느 정도 높은 언덕이나 외진 곳에 수림 석천(石泉)이 어쩌다 남아 있긴 하나 일부 인사들의 독점물이 되어 시민들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다.

출처: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

학소도는 열린 집이다.

누가나 찾아와 자연과 함께 편안하게 쉬다갔으면 좋겠다. 

 

대학 동문들과 함께

 

 "사람 사는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편지 한 통 올 데가 없다면,

그 집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방이나 마루에 놓아 둔 가구들도 빛을 잃고 말 것이다.

다정한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과 음성 덕분에 그 집은 생기가 돌고 빛과 향기를 발하게 된다."

- 법정 

 

학소도가 지어지기 전의 빈터

옛 학소도의 모습들

1년 전에 비해 많이 변한 2002년 학소도의 모습

"자연의 조화와 질서 앞에서 우리는 실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대지인 자연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자양분을 줄 뿐 아니라 교훈을 준다.

그리고 자연은 지친 인생이 기대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죽고 난 후 차디찬 시신이 되어 묻히거나,

한줌의 재로 뿌려질 곳 또한 그 자연이다."  - 법정

 

"내가 신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그 책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대자연이 곧 그 책이니까."

- (사막에서 수행하던) 안토니오 교부

모란앵무 '모모'와 '무무'

"세상에는 유일하게 신성한 경전이 있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이름의 경전이다.

그것만이 독자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

- 하즈라트 이나야트 칸

"가능한 한 자주 자연 속으로 떠나 그곳에서 기도하라.

그러면 모든 풀과 나무들이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

그 친구들이 그대의 기도 속으로 들어와 그대에게 힘을 주리라."

- 브레슬로브의 랍비 나하만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 법정

 

학소도의 항공사진(사실은 아파트 18층에서 찍은 사진)

2003.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