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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崔 一 谷 (1934. 5. 6 - 2002. 3. 14)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님 서재를 둘러보다가

오래된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에 말린 종이 위에서

아버님이 병원에 가시기 직전에 직접 타이핑하신

시를 보았습니다.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할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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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2월 28일

범석에게

너가 미국으로 간지 6개월 동안 많은 공부를 했지만 어학(영어)이란 단기간에 미국 학생들과 같이 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어는 할수록 어려운 언어란다. 너의 말처럼 영어가 딸리니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미국 학생들이 1시간 공부할 때 너는 5시간, 10시간 공부하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지금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지난번 편지에 하루에 5시간만 더 가질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든가 평생에 그렇게 느껴본적이 없었고 헛되게 보낸 시간들을 생각할수록 자신이 바보처럼 생각된다는 말은 너의 요즘의 솔직한 심정이라 생각하고 아빠는 매우 기쁘다.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말은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동양 격언에 소년은 쉽게 늙어가고 학문은 이룩하기가 어려우니 1초의 시간인들 어찌 헛되게 보낼소냐란 말이 있다. 너가 이제 그런 심정을 직접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만도 너의 인생에 그리고 앞으로 너의 공부에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부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죽도록 공부한 하겠다는 심정으로 노력하기 바란다.

오늘은 이만 줄인다.

Bonn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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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8일

범석에게

8월 11일자와 그 다음 편지(날짜 없음) 2통, 9월 5일 한꺼번에 잘 받아보았다.

너가 AWE[4주간의 등산학교/극기훈련 과정]에 간 후, 편지가 없어 무척 걱정했구나.

이곳 우리는 모두 잘 있다. 미나도 학교가 시작되었고 또 9월 10일은 이곳 '추석' 명절이란다. 그래서 제사준비도 하고 있다. 추석과 제사 지내는 걸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너의 AWE에서 보낸 편지는 아빠를 매우 감동시켰단다. 너의 말처럼 물질만능의 미국사회에서 그와 같은 정신훈련을 시킨다는 것은 참 필요한줄 안다. 더욱이 너가 그와 같은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니 무엇보다 기쁘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아끼는 훈련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육체의 괴로움을 정신력으로 이기는 克己(극기) 훈련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할 줄 믿는다. 그리고 자연속에서 육체의 피로를 이기면서 혼자서 명상하는 solo 훈련은 정말 감동적이었단다. 그때 너가 쓴 시(詩)는 참 재미있었다. 아마 너의 평생에 처음으로 써본 시가 아닌지? 너의 시(詩)에서처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도 그리고 학생이 공부한다는 것도 같은 것이란다. 그래서 너의 one step, next step, another step은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 정신을 터득했다면 너에겐 이번 AWE가 매우 값진 것이었다고 믿는다.

이제 너의 앞에 새로 넘어야할 높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매우 바쁘고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순간 순간을 열심히 노력하여 그 결과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마치 one step, next step, another step처럼......

그럼 부디 건강 조심하고 자주 편지주기 바란다.

서울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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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11일

하느님, 우리 범석에게 용기를 주옵소서……

범석에게

너가 말한 좀더 생각이 깊고 넓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공부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은 옳은 생각이라 믿는다. 여가 시간에 독서를 많이 하도록 하여라.

범석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knowledge)도 중요하지만 지혜(wisdom)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식은 공부로 얻어지지만, 지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너가 요즘 이것도 옳아 보이고 저것도 옳아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니, 판단력은 바로 이 지혜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니라. 그러나 이 지혜는 지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지식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어둡고,

             지혜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위태롭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한 유명한 말이다. 그러니 지식과 지혜를 겸비해나가야 하리라 믿는다. 너가 말한 내가 결정한 길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음으로 걷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고 있는 것이니,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 사람이 하루 빨리 될 수 있기 바란다.

범석! 너는 너무 욕심이 크고 또 조금 서두르는 성격이 있다. 희망은 크게 가지되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생각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히 걸어가도록 하여라. 결코 서두르지 말아라. 무엇이든 너무 바쁘게 서두르면 잊어버리는 것도 많고 또 실수하는 일도 많게 마련이다. 바쁠수록 천천히……” 이 말을 너의 성격과 비교해 생각해 보아라.

범석아, 용기를 갖아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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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7일

범석에게

7월 26일자 편지 잘 받았다. 무사히 지낸다니 안심이 되는구나.

이재 8월 20일이면 너의 대학생활도 2학년에 접어드는구나.

지난 1년 동안의 경험을 살려 2학년 때는 진짜 공부를 열심히 하기 바란다.

항상 말하지만, 너는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다 해보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그것은 마치 길이 없는 숲속에서 방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숲속의 모든 나무들과 풀들을 다 하나 하나 살피면서 갈 수는 없다. 그러다가는 진짜 가야할 길을 한발자국도 갈 수 없게 되고 만다. 숲을 살피되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알고 꼭 필요한 것은 자세히 관찰하고 나머지는 그 윤곽만 알고 지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체계가 없는(줄기가 없는) 지식은 지식의 쓰레기통과도 같다"는 말이 있다. 이것저것 너무 욕심부리지 마라. 그리고 이제는 너의 가야할 길을 찾아야 한다. 너의 전공(major)을 뚜렷이 세우고 결정하라는 뜻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꽃도 아름답고 열매도 풍부하게 열리며

샘이 깊은 물은 가물음에도 마르지 않고

큰 냇물을 이루어 바다에 가느니라

우리나라 이조시대 때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그 한글로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에게 물어보고 늘 마음에 새기도록 하여라.

너가 summer job을 구하고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기 바란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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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3일

범석에게

지난 9월 6일자 Istanbul에 도착해서 보낸 편지를 9월 16일에 받고 그후 소식이 없어 몹시 걱정했단다. 지난 10월 2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래도 소식이 없어 온 집안이 불길한 예감으로 어제 밤엔 밤을 세웠구나. 외무부에 연락하고 인도 둔 스쿨에 국제전보 치고 또 국제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그곳 전화번호를 알 수 없어.....지금쯤 이번에는 너가 한국에서 보낸 전보에 놀라게 되었겠구나. 불안한 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고 오늘 아침 다시 그곳 학교 교장에게 편지를 보내려든 참에 오늘 너의 9월 9일자 Athene에서 보낸 편지가 서울 집에 도착했다. 이제야 안심이 되고 긴장이 풀리는구나.

그러나 아직도 너의 여행(Cyprus --> Israel --> Egypt --> India) 일정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고 제발 모든 일정들이 무사해주기를 하느님께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무쪼록 몸성히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와주길 바라며, 또한 장래에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가 깊고 튼튼한 큰 나무로 자라주길 바라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또한 인도에서의 생활을 통해 모쪼록 귀중한 체험이 되어 너의 정신에 살과 뼈가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p.s. 여행 중 너무 돈을 절약한다고 위함하고 값싼 호텔 같은데 들지 않도록 하여라. Youth Hostel 정도가 좋지 않을까? 그리고 항상 여러 사람들과 함께 관광지를 다니고 절대 혼자서 관광객이 없는 곳을 찾지 않도록 하여라. 돈은 항상 Travel Check 등으로 갖고 다니도록.

아빠, 엄마,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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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11일

범석에게

꿈과 용기와 인내를……

2월 16일자 Kovelam에서, 2월 20일 Kodaikanal에서 그리고 Orty와 Calcatta에서 보낸 편지 등 모두 잘 받았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지도를 펼쳐놓고 너의 여행행로를 더듬으며 참으로 넓은 인도대륙을 머리도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몸성히 계획대로 추진되고 있으니 기쁘구나.

지금쯤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 속의 어느 마을(도시)에 있는지? 지도에는 POKHARA가 나타나 있지 않으니 궁금하다. 네팔도 인도와 함께 불교문화의 성지로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이 있으니 꼭 찾아보아라. 1)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 (네팔에 있음), 2)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인도), 3)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처음 법문(法文)을 설파한 바라나시 (인도), 4) 부처님이 열반한 쿠시나가라 (인도), 5)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설법한 영취산 (인도) 등도 가능하면 가보도록 하여라.

그곳 네팔에서는 한곳에 장기 체류한다니 세계역사(문화사)와 철학책 등을 많이 읽도록 하여라. 영국 역사학자 토인비가 쓴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n the History)도 매우 유명한 책이니 꼭 읽도록 하여라. 그리고 철학(Philosophy)은 먼저 개론(principle)부터 읽고 특히 흥미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전체적인 파악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 외에 사회학(sociology)도 정치와 경제 등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학문이니 시간 있으면 읽도록 하여라.

이곳 한국도 긴 겨울이 지나고 요즘 차츰 따뜻해지면서 봄기운이 돌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국회의원 선거가 아마 4월 중에 있을 예정이다. 그때 너가 귀국하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겠구나.

오늘은 두서없는 말로 이만 줄인다. 부디 건강에 특히 조심하여라. 그리고 자주 엽서라도 보내도록 하여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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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젊은 시절 유학하시던 캐나다 오타와 전경/기숙사방(아래)

70년대 초반 미국 뉴욕 여행 중

사진 뒷장의 메모: 1) 국회의사당 뜰에서 찍은 것

2) 이발사가 머리를 짧게 깍아 흉스럽다

3) 혼자서 쓸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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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당시 서독) 본(Bonn) 한국대사관 근무시절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셨던 독일인 콜겐 신부님

독일의 한인교민들 결혼식에서 주례를 많이 맡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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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11일

범석! 너의 꿈많은 대학생활도 이제 마지막 학년에 접어들었다. 그간 어려움 속에서도 너는 용기와 인내를 갖고 잘 싸워 훌륭한 성과(성적 + 인격)를 거두어왔다고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 goal in의 순간이다. 축구의 "승부차기"처럼 가슴 조이며 너의 공부를 지켜보고 있다.

독일 속담에 "마지막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다"는 말이 있다. 마지막에 정말 유쾌한 승리의 웃음을 웃는 자가 되기 바란다. 또 연락하마. 분투하여라. 우리 가족 모두가 기도하고 있다.

p.s. 너의 지도교수 Scalapino 교수가 한국 신문에 interview한 기사 보낸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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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9. 25

범석에게

이제 Berkeley에서의 대학생활(undergraduate)도 마지막 학년이란 뜻깊은 한 학년을 맞이하여 꿈 많은 젊은 날을 후회 없이 보내기 바란다.

너의 말처럼 대학생활은 무한한 꿈과 이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 찬 인생의 가장 귀중한 시절이란 것을 잊지 말아라. 이제 대학원이나 사회에 나서면 좁은 현실 속에서 싸워야 할께다. 그리고 인생이란 결코 그 순간 순간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미리 예정해 놓은 것이 아니란 너의 생각은 참으로 옳은 생각이다. 그러니까 성경에서도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그 문을 열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문을 두드려라. 그런 자에게 하느님은 그 문을 열어줄 것이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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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학소도 뜰에서 애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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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2. 9

범석에게

        - 꿈과 용기와 인내를......

너가 떠나간지도 벌써 한달이 가까워 오는 것 같구나.

너의 어머니 생신 축하 카드 잘 받았다.

너의 소식은 언제가 새롭게 성장해 가는 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쁘고 마음 든든하게 느껴지는구나.

 

새학기를 맞아 매우 분주하리라 믿는다. 새로 등록한 과목들은 재미가 어떤지?

새로 배울 과목들을 생각하면 미지의 꿈처럼 가슴이 설렌다던 너의 말이

새삼 생각나는구나. 인간이란 항상 새로움 꿈을 쫓는 존재라 생각한다.

그 새로운 꿈이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즐겁고 그 꿈을 현실로 성취하는 것이

사는 보람(가치)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용기와 인내를 갖고

꾸준히 노력해야 하느니.....노력 없는 곳엔 성취도 없다고 믿는다.

 

새 학기를 맞아 새로운 꿈의 성취를 위해 바쁘게 노력하는 범석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도 저절로 마음이 즐거워진단다. 범석이는 바로 우리 가족의

꿈이요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에서의 마지막 열매를 거둔다는 각오로

분투하기 바란다.

 

너의 소식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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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 12일

범석에게

        - 꿈과 용기와 인내를......

오랜만에 너의 편지 받고 반가웠다.

그리고 졸업을 영예스럽게 마쳐 축하한다.

이제 너의 미국에서의 공부도(6년간) 뜻있게 마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할 공부가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제발 그 일들이 너가 뜻하는데로 잘 이루어졌으면 하는 걱정과 바램이 또한 간절하다.

토인비도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 했다. 개인의 역사도 항상 해치고 나가야할 일들과 그것과 싸워 이기고 극복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Berkeley에서의 졸업은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의 시작에 불과하다.

 

너의 여자친구문제는 처음에는 매우 쇼킹했는데, 너의 편지에서 다만 친구로서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믿고 안심하겠다.

너는 한국에서 한국을 위해 일할 큰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않도록 하여라.

 

모처럼 너의 어머니와 즐거운 시간 갖기 바란다. 그간 너는 가족들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빨리 귀국해서 가족과 함께 지낼 날을 기다린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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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영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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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 천주교 나자렛 공원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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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8일

사랑하는 범석에게

요즘은 안정된 마음으로 학업에 열중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며칠 전 전화통화가 모처럼 안정을 되찾은 너의 마음에 또 물결을 일으키지 않았나 걱정이 되는구나.

1994년 7월 6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너를 떠나보내며, 자랑과 기쁨에 차 있어야할 내 마음이 왜 그렇게도 허전하였을까? 너를 어린 나이에(16세) 독일에서 난생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미국으로 떠나보내면서도 나의 마음은 그때 김포공항에서처럼 허전하지 않았다.

너가 처음 집을 떠난 후 너는 씩씩하고 부지런하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젊은이로 자라, 자랑스런 Berkeley대학의 우등 졸업생으로 귀국하였다. 그 해가 1990년이었던가? 그 후 너는 한국에서 자랑스런 군대생활과 모범적인 서울대생으로 눈부시게 활약했고, 또한 너무도 보람찬 학교생활을 했다. 너의 한국생활에서의 기여와 보람은 포철장학금으로 보답되었다고 믿는다. 게다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얻어진 하버드대학원의 입학허가는 너를 더욱 개선장군처럼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이 백전백승의 개선장군을 떠나보내면서 나는 왜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을까?

첫째는, 너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내가 부모로서 좀더 잘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우리는 너무도 오래 떨어져 살았으며, 가족이 함께 한 그 짧은 기간(4년?)이나마 지난날 못 다한 사랑과 행복을 흐뭇하게 베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의 오랜 헤어진 삶은 - 특히 정서적 성숙기의 - 서로의 생각과 이해를 엇갈리게 했다. 이에는 서로의 삶의 문화적 차이에도 기인한바 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너의 한국생활 중에도 일어났고, 특히 너가 떠나기 전날의 의견차이에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못난 아버지의 소이라 생각한다.

이런 만감의 생각들이 너를 다시 떠나보내며 기어이 내 눈을 눈물로 흐리게 하드구나.

둘째로, 그때 너는 한국을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하버드대학원의 입학을 1년 연기 신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못해 떠나는 사람의 애처로움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너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한국생활, 가족, 친구, 학교생활의 보람 그리고 외국생활의 외로움과 무한경쟁생활(공부)에 대한 지침......이런 것들이 너로 하여금 떠나기를 주저하게 하는 줄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더 중요한 학업의 성취를 위해서는 어느 때고 다시 떠나야할 처지가 아닌가를 생각할 때......그리고 다시 돌아와 더 큰 보람을 위해 일할 것을 생각할 때 자잘한 정에 매달리지 말고 선뜻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범석아! 그러나 이 애비도 그때 너가 왜 한국을 떠나기를 아쉬워했으며 하버드대학원 입학을 1년 연기할 것을 생각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구나! 이번에 우연히 너의 그때의 일기장을 훔쳐보다가 그때 너가 "젊음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애비로서 미쳐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이제사 너무도 가슴이 아파오는구나!

셋째, 나는 언제나 너의 "무한욕심"을 두려워했다. 너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바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겼다. 너의 오랜 여행경험이 그러했고......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런 이들이 다행이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일들을 두고 나는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운에 의존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운이란 다만 노력하는 가운데 어쩌다 주어지는 기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 기회를 타고 자기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이 행운의 성취에 대해 나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언제나 그러할 것으로 오만한 생각을 키워온 것은 아닐까?

넷째, 나는 너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를 두려워한다. 자칫하면 현실도피의 은거처이거나 현실패배자의 자기변호방패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현실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더욱이 한국사회의 현실을 내가 살아가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자. 그 현실 속에서 더불어 살면서 그들이 따르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자. 너의 현실에 대한 냉소는 어쩌면 너의 무능의 변명이 될 수도 있다. 구름을 타고 홀로 높은 곳을 떠다니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땅위에서 더불어 땀흘리며 웃고 우는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생활인이 되자!

범석아!

어쩌면 이런 나의 생각들은 이미 너가 간파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남 앞에 나를 자랑하기에 앞서 항상 나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귀한 것을 얻었을 때는 언제나 그것이 내 능력에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과분한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알자! 크고 높은 것은 언제나 적은 것이 오랜 시간을 두고 모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 적은 것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 "젊은 날의 욕망"은 가장 귀한 보배. 그러나 귀한 것일수록 깊이 감추어 남이 엿보고 탐내지 않게 간직하는 법이 아니니? 그 욕망이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쫓아와 그 귀함을 축복해 줄 것이다. 그 탄생의 기쁨을 위해 우리는 고난을 참고 남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너의 나이도 30세. 너의 일은 너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너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부모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효심)은 우리도 잘 알고 기특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의 생각 때문에 너의 생각과 할 일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홀로 서서 홀로 걸어가는 독립과 자립의 앞날이기를 바란다. 그것은 실로 외로운 길. 그러나 삶이란 이 고독과의 긴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고독과의 투쟁에서 이기는 자가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앞날은 아직 멀고 창창하다. 일시적인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7전8기 "오뚝이 정신"을 갖자.

사랑하는 범석이의 앞날에 건강하고 밝은 새길이 활짝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in advance) 졸업 축하한다.

한국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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